2010년, 이창동 감독이 선보인 영화 '시'는 현대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섬세하고 철학적인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윤정희가 주연을 맡은 이 작품은 노년의 한 여성이 시를 쓰기 위해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단순히 문학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아닌,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며 관객에게 깊은 사색의 여지를 제공한다. 특히 2010년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하며 그 예술성과 완성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삶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피어난 시
'시'의 주인공 미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60대 여성이다. 손자를 키우며 살아가던 그녀는 어느 날 문예 수업을 듣게 되고, 시를 써보라는 과제를 받는다. 그러나 시를 쓰기 위한 여정은 그녀가 마주해야 할 잔혹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손자가 친구들과 함께 저지른 끔찍한 범죄의 진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미자는 자신의 삶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영화는 시적 감수성과 극도의 현실감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시를 쓰려면 사물을 다르게 보아야 한다는 말처럼, 미자는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새롭게 바라본다. 하지만 그녀가 직면한 현실은 시가 태어날 수 없을 것처럼 냉혹하다. 손자의 범죄, 사회의 무관심, 가해자 가족들의 은폐 시도는 미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모순과 균열을 일으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시를 쓴다.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가장 깊숙이 껴안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시'는 단순한 서사를 넘어서, 삶과 죽음, 죄와 용서, 아름다움과 고통이 교차하는 철학적 성찰을 제공한다. 미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전과 달라졌고, 그 변화는 관객에게도 시선의 전환을 강요한다. 시는 언어를 통해 감정의 깊이를 탐구하는 매개체이며, 미자의 시도는 관객의 내면을 울리는 힘을 지닌다.
윤정희의 섬세한 연기와 이창동의 시선
영화 '시'는 오롯이 윤정희의 얼굴에서 출발해 그녀의 얼굴로 마무리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랜 시간 스크린을 떠났던 그녀는 미자라는 인물을 통해 깊은 내면 연기를 보여준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눈빛과 미세한 표정 변화로 표현하는 윤정희의 연기는 절제 속에 큰 울림을 남긴다. 특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서 바람을 느끼거나, 한 구절의 시를 읊조리는 장면에서는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관객에게 직접 전달된다.
이창동 감독은 이 같은 배우의 연기를 극대화하는 연출을 택한다. 불필요한 음악이나 과장된 카메라 워크 없이, 차분하고 절제된 미장센을 통해 인물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자연광과 정적인 카메라, 그리고 인물 중심의 구도는 '시'라는 영화의 문학성과 철학적 메시지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또한 이창동 감독 특유의 리얼리즘은 '시'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는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되, 그것을 고발하거나 과장하는 대신, 조용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따라간다. 이는 관객이 판단이나 감정의 방향성을 외부로부터 주입받기보다는, 스스로 고민하고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이창동의 연출은 관객을 수동적인 존재가 아닌, 이야기의 능동적 해석자로 이끈다.
언어와 침묵, 시의 경계에서 말 걸기
'시'는 제목 그대로, 시에 대한 영화이지만 단순한 창작의 과정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작품은 언어가 가지는 한계와, 언어로 다 표현되지 못하는 감정의 영역까지 아우르려는 시도를 한다. 미자는 끔찍한 진실 앞에서 무엇을 말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지만, 시를 쓰는 행위는 그녀에게 일종의 해방이자 저항의 수단이 된다.
이 영화에서 시는 감정의 표출이자 사회를 향한 은유적 발화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 차마 입에 올릴 수 없는 고통을 미자는 시로써 표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결국 그녀가 선택하는 방식은 침묵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자가 세상을 떠났는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녀가 남긴 시는 그녀가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꼈는지를 가장 깊이 있게 증명한다. 이는 침묵이 말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강렬한 메시지다.
이처럼 '시'는 단순한 줄거리의 기승전결보다, 감정과 사유의 흐름을 따라가는 작품이다. 이는 관객에게도 동일한 방식을 요구한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느리고 불친절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시'라는 제목에 걸맞은 접근 방식이다. 시는 읽는 이의 경험과 감정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듯, 이 영화 역시 각자의 내면에 따라 그 깊이가 달라지는 작품이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잔잔한 파문처럼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는다. 삶의 아름다움과 잔혹함, 언어의 위로와 침묵의 무게를 모두 담아낸 이 작품은 영화가 얼마나 깊은 사유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귀한 예다.
윤정희의 마지막 주연작이 된 이 영화는 단지 배우의 귀환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그녀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고요한 순간을 기록한 작품으로 남았다. '시'는 영화를 통해 시를 쓰고, 시를 통해 삶을 응시하며, 결국 관객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지닌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하나의 시를 천천히 음미하는 독서와도 같다. 그 감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어지고, 더욱 뚜렷해진다.